인천의 어느 동네를 달리고 있었다. 택시에는 일흔을 훌쩍 넘긴 큰아버지와 예순도 안 된 막냇동생과 그의 딸인 내가 타고 있었다. 목적지는 주안동 ‘현상 약국’. 큰아버지는 택시 기사에게 주안에 오래된 약국 두 개 중 하나가 문을 닫는다고 말을 걸면서 재개발 얘기를 꺼냈다. 큰아버지 고향은 파주 장단. 전쟁 때 도림동으로 피난 와 영등포에서 평생을 사시다 인천에서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그런 큰아버지가 타고난 인천사람마냥 주안동의 재개발에 대한 염려를 숨기지 않으셔서 의아했다. 자신 역시 이주민인 동네에서 개발이라는 변화를 걱정하며 택시 기사와의 몇 마디 대화로 애써 근심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마음은 큰아버지 개인 인생사를 생각하면 낯설었지만, 자주 이사를 다니는 도시 거주자로서는 익숙하기도 했다. 그 정감 어린 씁쓸함을 받치고 있는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절절히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큰아버지가 살고 계신 주안 2~4동은 현재 재정비촉진지구에 속해있다. 거기서 맞닿은 신기 사거리를 지나면 신기시장(新基市場)이 있다. 시장을 지나자마자 또 다른 재개발 구역이 나온다. ‘공간 듬’이 위치한 주안 7 동이다. 워크숍 소식을 몇 번 전해 듣다가 마침내 예술인 파견 지원사업 결과 보고전으로 <신기상회(新奇商會)>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다고 하면 먼, 가깝지 않은 ‘공간 듬’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낯선 동네에 위치한 듬의 사무실로 불쑥 들어가니 공간을 지키던 관계자는 ‘왜 여기까지’라는 냉담한 겸손함으로 방문자를 마주했다. 그것도 잠시, 전시장으로 함께 이동해 간단히 작업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우리 전시를 보러 왔군요!’라는 환대도, 알아서 잘 보라는 무관심도 아닌 의아한 반응을 껴안고 둘러보게 됐다.
이번 전시<신기상회>는 6개월 동안 공간 듬에 파견된 예술가 강정아, 박지한, 손승범, 안상훈과 퍼실리테이터 김홍기가 참여했다. 또한 필자가 방문한 날이기도 한 10월 27일의 <24시>에 파견예술인 손승범, 안상훈 외에도 신재은, 조은희 작가가 참여하며 연속적이고 균질적인 하루라는 시간을 사등분 해 공간 듬의 안과 밖에서 예술 또는 예술 행위가 그곳에 개입하고 작동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움직였다.
주워온 물건, 발매트, 술, 영화, 엄마
동네에서 주워온 물건들이 전시장 한 편에 놓인 구조물에 차곡차곡 진열돼 있다. 손승범 작가의 설치 <염원을 비는 기념비>다. 보잘것없는 동네의 파편들은 동네와 얼마나 상응할까? 지역 리서치를 통해 버려지고 잊힌 사물을 주웠다는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인지, 전시장이 시장 근처인 것치고는 시장에서 주웠을 법한 사물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아이들, 어른들이 사는 동네의 잔여물 혹은 쓰레기는 이미 소진된 것으로서 기념해야 할 대상으로 나열돼 있을 뿐이다. 플레잉 카드, 나사, 돌하르방, 매니큐어, 훌라후프, 돌, 소주병, 부탄가스, 선 캡, 박스테이프, 핸드백 모양 장난감케이스, 휴대용 선풍기, 의자, 벽돌……. 잊힌 사물일수록 어느 시간과 장소를 가득 담고 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다른 면에는 발매트 3개가 부착돼 있다. 크기는 비슷하지만 모두 다 다른 발판은 적당히 더럽다. 안상훈 작가가 7월 중순부터 한 달에 한 개씩 교체해 드나든 흔적을 남긴 설치 작업이다. 드나든 사람이 공간 듬에 찾아온 꿈다락학교 아이들인지, 신기해하며 구경 온 상인들인지, 예술가들인지 알 수 없다. 무언가가 지나간 흔적만이 남아있다.
이 흔적을 남긴 이들은 손승범 작가의 <염원을 비는 담금주> 워크샵을 하러 온 참여자들이기도 할 것이고, 영화 해설을 하는 박지한 작가의 영화 상영회에 온 주민들이기도 할 것이다. 박지한은 <한국의 뉴웨이브-돌연변이들>이라는 테마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0년마다 2편씩 선정해 총 8편의 한국 영화를 상영하고, 전시에는 상영한 영화의 포스터와 텍스트(명대사)를 기록했다. 발 매트를 더럽힌 이들은 강정아 작가의 <엄마에 대하여> 워크숍에 온 이들일 수도 있다. ‘술’이나 ‘영화’, ‘엄마’는 누구에게나 얘깃거리가 많은 소재인 만큼 동네 주민의 참여율을 높일 수 있는 카드인 동시에 예술가와 주민을 잇는 매개다. 그만큼 보편적이고 동시에 굉장히 사적이거나 내밀하다.
특히 강정아의 <엄마에 대하여> 워크숍은 ‘엄마’를 자식을 향한 모성으로 점철된 존재로 보기를 중단하고, ‘나의 엄마’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만큼 허구적으로 기록한다. 전시장에는 『붉은색 옷을 입고 식장을 나선 여자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시작될 줄 몰랐다』라는 작은 책자로 남았다. 네 명의 참여자가 8월부터 10월까지 6개의 주제로 단편적인 글을 써 엮었다. 각자의 엄마 이야기는 모두 다르다. 어느 부분은 소설 같기도 하고, 다른 구절은 오늘 아침 일을 가볍게 묘사한 것 같기도 하다. 미안한 마음, 원망스러운 마음 등 단순한 형용사로 묘사되지 않는 복합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이 언어로 표현됐다가 다시 감춰지기를 반복한다. 더 많은 주민의 얘기는 나누었을지라도 기록되고 공유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발매트에 뭉쳐진 흔적처럼 어떻게든 기록되었다면, 단어 하나나 공백으로라도 기록되었다면 발생했을 지점을 상상했다.
수지타산과 상관없는 상인
<신기상회>라는 제목은 공간 듬이 신기(新基; 새로운 터) 시장에 드나드는 상인과 주민들이 신기(新奇;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르고 놀라움)해하는 공간이라는 점, 파견 예술가 자신들 역시 무언가를 팔러 나온 상인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예술가들은 전시 서문에 스스로를 “수지 타산과 상관없는 상인”이라고 언급했다. 그들은 예술가로서 ‘작업’을 하기에 수지타산과 상관없지만, 예술인 파견 지원이라는 예술인으로서 활동(또는 노동)에 대한 공적 지원이 일시적으로 보장된 상태로 워크숍이나 작업을 내놓는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상인’으로 정체화했던 것 같다. 이들의 활동은 온전히 공간 듬의 공간 활성화를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온전히 자신만의 작업도 아니었다. 하지만 네 명의 예술가는 모두 자신의 작업 맥락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파견예술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낯선 방문자인 ‘나’를 대하는 독특한 태도에서부터 그들이 6개월 동안 진행한 워크숍의 성격과 이를 기록한 결과 보고전 등, 곳곳에서 드러났다.
작가로서 나의 작업과 파견 예술인으로서의 일 사이에 선다는 것에 대한 고민은 오히려 작가와 공간 듬이라는 공간, 그리고 인천 주안을 연결하는 고리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네에 오는 길은 어떠했는지, 동네는 어떤 색을 띠고 어떤 냄새가 나는지, 어떤 정서를 체감했는지, 여기서부터 예술가들은 구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작가들이 <신기상회>에서 팔고 있던 것은 자신들이 길지 않은 사업 기간 동안 동네와 주민을 마주치면서 영향받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서 다시 그들 앞에 내놓은 것들이었다. [ ]
김솔지
전시: 신기상회(新奇商會)
기간: 2018.10.17 - 2018.10.31
작가: 강정아, 박지한, 손승범, 안상훈, 신재은, 조은희
장소: 공간 듬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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