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바니안 패밀리즘>은 ‘실바니안 패밀리’라는 인형에서 출발했다. 이 인형은 보송보송한 털과 앙증맞은 표정을 가진 동물 인형으로, 주로 4인 가족으로 구성된 인형 세트를 대표 상품으로 판매한다. 인형 외에도 집과 가전, 생활잡화 등 우리 실생활에서 사용할법한 많은 것들이 미니어처 크기로 재현-판매하고 있다. 구매자는 이 인형을 수집하고 플레이하며, 실바니안이 말하는 ‘자연, 가족, 사랑을 소중히 간직하며 이웃을 배려하고 함께 어울리는’ 가상의 삶을 꾸린다.
‘실바니안 패밀리‘의 세계는 한없이 평화롭고 이상적인 사회다. 치마를 입은 동물이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고 부띠끄에서 쇼핑을 하거나, 바지를 입은 동물이 환자를 돌보고 피자 배달을 한다. 아기들은 젖병을 하나씩 물고 아기침대에서 잠이 든다. 이 작은 세계에는 아무런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덧붙여 구성원들도 모두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에 충실하게 설계되어 있고 그것에 만족한 듯 보인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재현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바니안 세계는 현실 세계와 매우 닮아있다.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수면 아래로 끌어내리고 서둘러 미봉책으로 매듭짓는 사회. 그래서 언뜻 보았을 때는 너무나 조용하고 굳건해 보이는 일상이 그것이다. 문제시되는 상황을 지우고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배제할 때에 이 기만적인 평화는 지켜진다. ’실바니안 패밀리‘를 보면서, 인형이 가진 귀여움만을 즐기기에는 꽤나 입맛이 씁쓸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내가 사는 사회는 가족이 구성원 개인의 에너지원이자 둥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하면서 나머지 가족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아빠는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청소년들은 공부, 공부, 공부. 덧붙여 문밖 이웃들은 매우 따뜻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과 물질을 공유해 준다고 한다. 이러한 선량한 사람들이 모여 평화를 만들기에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유지된단다. 이 빤한 말이 거짓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이상적인, 그러나 이상한 ’정상 가족‘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누락되어 있고, 지워져 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하나씩 짚어보고자 <실바니안 패밀리즘>은 제작되었다.
<실바니안 패밀리즘>을 제작하며, 정상 가족과 관련된 담론과 함께 많은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리서치했다. 초기에는 정상 가족의 허술한 구조와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자 리서치를 진행하였으나, 점점 사회와 제도가 언급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처한 문제에 대해 집중하게 되었다. 다양한 정체성과 속성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꾸린 가정을 국가가 인정하지 않거나, 사회가 정한 ’표준‘에 맞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각종 제도를 만드는 등의 일이 그것이다. 흔히 하나의 가족을 상상할 때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은 사회가 그렇게 상상하도록 당사자를 배제한 결과다.
애초에 <실바니안 패밀리즘>은 7개의 이야기를 구성으로 했다. HIV 여성 감염인, 장애인, 난민, 성소수자, 재난 피해자, 청소년, 해고노동자의 문제를 언급하려 했다. 그러나 작업을 진행할수록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 문제들이 실은 피상적으로만 이해했거나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작업 기간은 마감이 정해져 있고, 예산과 나 자신의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여 이 주제 중 청소년, 해고노동자의 담론은 미처 소화하지 못했다. 물론 작업으로 제시한 주제들에 대해서도 무리 없이 소화했다는 자평을 내리기는 힘들다. 작업을 다시 볼 때마다 잘못 언급한 부분, 놓친 부분과 정리하지 못한 부분, 오독의 가능성이 있는 지점이 계속해서 보인다. 작업의 완성도와 예술성을 퀄리티 좋게 뽑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는 별개로, 당사자의 삶을 충실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는다.
HIV 여성 감염인의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 1편 ’피의 대화‘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지면이 내 아쉬움을 하소연하자고 꾸려진 것은 아니지만, 작업을 볼 때마다 고개가 떨궈지는 것을 극복하기란 힘이 든다. HIV 에이즈를 마치 꾸준한 약 복용과 처방으로 ’극복‘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로 서술한 지점이 그렇고, 비교적 단순한 캐릭터 구성과 HIV 여성 감염인이 놓인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지점을 상세히 살펴보고 효과적으로 구현하지 못한 지점이 그렇다. 내 작업을 보고 HIV 여성 감염인의 삶 전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관객은 없겠지만, 여전히 HIV 여성 감염인의 삶이 가시화되지 않았고 충분한 논의의 장에 서지 못함을 생각했을 때 이것은 뼈저린 후회로 다가온다.
장애인의 탈시설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 2편 ’내 맘대로 먹을 수 있는 수요일‘은 내가 만든 다섯 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이다. 나는 이 작업에서 장애인을 마냥 선하게 그리거나, 비장애인의 도움이 있어야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객체로 구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장애인이 시설 안에서 살아갈 때 삶의 일부분을 자신의 의지가 아닌 보호자나 시설 직원의 영향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고 싶었고, 시설 문턱을 넘기보다 더 힘든 것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가 차별적인 시선으로 장애인을 바라본다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었다. 나의 의도가 잘 구현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들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에피소드기도 했고 제작의 재미도 있었다.
관객이 가장 호평한 에피소드는 4편 ’레인보우 썸머‘다. 레즈비언 커플의 좀비 참사 탈출을 묘사한 작업으로, 이성애 중심으로 짜여진 가족 제도로 인해 성소수자가 배제된 상황을 구체적인 사건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관객의 피드백 중 대다수가 에피소드 4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으로 생존자 대피소의 공무원이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을 때 고양이-곰곰이 커플에 감정이입이 되며 같이 짜증이 났다는 것을 꼽았다. 그리고 등장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다람쥐 ’한남이’가 헛소리를 늘어놓은 후 좀비에게 먹히고 작가의 손에 퍽퍽 맞아 나가떨어지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고 한다. 해당 부분은 NG없이 단번에 촬영한 부분으로, 나도 인형을 퍽퍽 내리치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잡설이지만, 이 부분을 구현하면서 치명타라는 예명을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2019년 <실바니안 패밀리즘>을 마무리하며, 2020년의 작업 계획으로 속편인 판 실바니안 패밀리즘, 고슴도치와 투지의 시간여행자>를 제작하려고 준비 중이다. 작업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군데 지원 서류를 써놓긴 했는데, 과연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속편은 재난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으로, 타임머신을 개발하여 재난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주인공 비버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며 불과 두 달 전 안전사고로 동료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고슴도치가 만나 벌어지는 사건을 줄거리로 한다. 이를 통해서 재난 이후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피해자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공동체적 논의는 무엇일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보는 이가 <실바니안 패밀리즘>을 통해 ’실바니안 패밀리‘가 내세우는 세계관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본 작업의 쓸모는 충분히 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증명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작업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기꺼이 연대하며 함께 사회가 그어놓은 정지선을 넘어 질주하고 탈주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
치명타
전시: 실바니안 패밀리즘
기간: 2019.09.28 - 2019.09.29
작가: 치명타
장소: 영화공간 주안
*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했으며, 사용 허가를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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